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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속의 단어들

제목 금강반야파라밀경 제목 해설
글쓴이 雲月野人 조회/추천 27/0
금강반야파라밀경 제목 해설
金剛般若波羅密經 題目 解說

◈ 金은 사람 人들이 땅 속에 干 묻혀 있을 때에는
잘 알수가 없었지만, 캐내어 제련을 하면 光이 나고
귀한 寶物이 된다.

金은 변함이 없으면서도 어떤 모양의 물건고 쉽게 만들어지고
또한 어떤 물건과도 잘 섞여지며 잘 만들어진다.
그러나 다시 거두어 제련을 하면
원래대로 金의 양과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이 金인데
우리들의 佛性에다 비유할만 하다.

金이 땅 속에 안에 있듯(干)
우리들의 佛性 또한 모든이들의 품 속에 있지만
잘 모르게 있기 때문에 金을 캐듯 찾아내고
찾아낸 金을 제련하듯이 일념 믿으며 으로 수행하면
光이 나는 귀한 寶物이 되듯이 지혜의 光이 나는 큰 성현이 될것이다.

우리들의 佛性들은
핵폭탄을 맏아도 깨어지지 않는 佛性이니
우주상 어느 것 보다도 강하고 어느것에나 잘 융화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이 佛性을 어느 金에다 비교를 하겠는가?
이런 佛性을 찾아내고 찾아내,
찾은 佛性을 잘 사용함이 굳셀 岡자 같이 함을 우리는 金剛이라한다.

◈ 剛 자는강하고 굳세게
산등성이 岡에서 칼 刂을 들고 적을 지키고 방어하듯
나의 억센 버릇들이 적과 같이 쳐들어 오지 못하도록
굳세게 잘 막아내고 지켜서 佛法에 맞게 수행하고 지켜
金과 같이 변함없는 佛菩薩과 같은 性品을 찾아내고 키워 나가는 것이다.

金剛이란
金과 같이 변함없는 나의 佛性을 찾아내어 확인하고 잘 지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금강(金鋼)
금강은 다이아몬드를 가리킨다.

그래서 콘즈도 이 경전을 “다이아몬드의 경전(Diamond Sutra)”이라고 번역했다.

그러나,
그 투명한 보석이 중국에서는 나지 않은 듯한데,
적어도 혜능은 몰랐던 것 같다.
그는 ‘쇠중에 강한 쇠’, 즉 강철 정도로 생각했고,
그래서 이것을 영양각, 즉 영양의 뿔로 깰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그는 자신의 <금강경 구결(口訣)>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불성은 견고하기 금강같다.
그러나 그 단단한 불성도 번뇌의 영양각으로 혼란될 수 있고,
또 그 번뇌의 영양각도 반야의 빈철로 깰 수 있다.”

혜능은 이 삼자의 관계를 이해하면, 불
교의 근본을 깨친 셈이라고 보증 장담한 바 있다.

금강은 다이아몬드이다.
그것은, 세 가지의 특징을 갖고 있는 바,
1) 예리하고
2) 견고하며,
3) 그리고 무지 비싸다.

어떤 것도 짤라 버리면서,
자신은 그 어떤 것에도 깨지지 않고,
그리고 결혼 예물이나 보석상에서 보듯
비싸고 귀하기 그지없는 물건이 바로 다이아몬드이다.

◈ 般 은 작은배 舟에다 책상 几를 또 又싣고 옮길 般이니
화두의 배(舟)에다
불법(几)를 또(又) 싣고 옮겨가야 할
般이어야 새로운 답이 나오는 것이다.

배운 것을 옮기고 옮겨가서 또 나온 것이 바로 같을 若입니다.

◈ 若는 풀 艸자의 우측에 있는 것이 약초 같다고 하여 같을 若인데,
같다는 뜻은 같을 如자도 있지만 단순하게 같지 않기 때문에
여기서 처럼 같을 若자를 쓰지 않았나 싶다.

같을 若자는 같다는 뜻도 있지만
이 若자는 중생들의 生老病死를 고쳐 주는 若이기 때문이다.

1 + 1 = 2 라는 답이 뻔히 나오듯
修行 + 話頭 = 佛性이다.
이것은 곧 般若이다.
이 般若가 바로 金剛佛性이다.

이 金剛佛性은 般若를 맛보지 않고서는 認定되지 않는다.
般若에서 얻어지는 若는
내가 가진 부처 性品의 佛菩薩과 같다는 것을
체험하여 알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般若는 法身 + 色身 = 補身이 생겨
法身 補身 化身 이라는 답이 나오듯,
般若는 답을 얻기 위한 = 와 같은 것이다.

= → 이 등호는 수학에서 수의 같음을 나타내는 기호이다.
1557년 웨일스인 로버트 레코드가 만들었다
equals sign (에퀠즈 사인)이라고 한다.

*반야(般若)
반야는 바로 그 다이아몬드의 특성을 갖고 있다.
미리 짚어두는 것이 좋겠는데, 반야는‘지혜’를 가리키지만,
그것은 독특한 특성을 갖고 있는 지혜임을 늘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불교가 중국에 자리잡고 난 다음에는,
번역어인 지혜보다 원어인 반야를
더 유통 정착시켰던 까닭도 그 때문이다.

반야는 아무래도 대인관계를 효율적으로 맺거나,
사무를 능숙하게 처리하는 노하우와는 별 관계가 없으니,
그것은 마음 근본의 특성과 기능을 아는 자기 통찰력이다.

반야는 마음의 내적 방해물들을 포착하고, 그것을 제거하는 힘이다.

그 방해물들을 전문적으로(?) 번뇌, 혹은 망상이라고 부른다.
불교는 이들이 마음의 본래 모습이 아니라고 한다는 점에서
순전히 객관적 분석을 표방하는 심리학이나 정신분석학과는 다르다.

반야는
1) 이 장애물들을 깨부수는 힘이다.
어떤 번뇌나 망상도 이 앞에서 깨어진다.
그리고 이 반야는

2) 워낙 견고하여, 그 무엇에도 부서지지 않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불안정하게 흔들리기는 한다.

혜능이 바로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다.
"반야는 바람 앞의 촛불처럼 번뇌와 망상 앞에 흔들리지만,
그렇지만 이 촛불은 결코 꺼지는 법이 없다!
번뇌망상이 태풍처럼 몰아처도 반야의 불꽃은 꺼지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이것만큼 견고한 것도 없다."

그는 대중들이 이 소식을 깊이 믿어주고,
그에 따라 살기를 권고했다.
삶이 그대를 속인다고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말고,
나와 남의 불성에 대한 신뢰를 가슴 깊이 보듬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 반야는

3) 지상 최고의 보물이다.
이보다 더 귀한 재산은 없으니,
그것은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라,
모래알처럼 많은 우주에 깔린 칠보로도 까마득히 견줄 수 없다.

로또 당첨금 정도는 새발의 발톱에 낀 때에도 못 미친다.
사람들은 물을지도 모른다.
“뭐 돈도 아니 되는 것을 그렇게 치켜 올릴게 무어냐.
그거 위선 아니냐.”

그렇게 생각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러나, 은행의 잔고는 늘어나는데,
삶이 여전히 공허하고 무의미하다고 느낀다면,
이 말을 수긍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이라 하겠다.

◈ 波 는 물 水에 가죽거죽 곁 皮이며 물결 波이며,
물결 波는 波動 波長의 뜻이니
불법 뜻이 전해지는 과정이 물결 波 같은 것이다.

◈ 羅 는 그물 罒을 만들 때에
실 絲로 작은(새) 椎를 많이 잡기 위해 만든 그물이다.

우매한 衆生들의 많은 數를 佛法에 들게 하려면
佛法의 그물 羅를 넓게 펴서 많은 衆生들이 般若를 얻게하려 함이다.

◈ 蜜 은 꿀벌들이 만들어 옿은 양식인데
사람들은 세상에서 제일 맛있고 귀한 음식으로 여긴다.

무슨 음식이든 먹다가도 맛이 뛰어나게 맛이 있으면
사람들은 꿀 맛이다고들 한다.
꿀 蜜자를 사용하지만,
여기에서 꿀 蜜은 벌꿀이 아니라
물질이 아니면서 세상에서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맛이 있으니
그 맛이 내가 가진 부처 성품 불보살과 같다는 것을
자신이 확신하고 체험하여 알아내는 것이다.

이것 보다 더 맛있는 꿀 蜜맛은 없다.
波羅密은 꿀 蜜 보다 더 맛있는 佛法을
모두 같이 공유하게 하는 法則이며 과정이다.

또한 波羅密은 大乘이며 布敎라 할수 있는 것이다.


*바라밀(波羅密)
바라밀은 도피안(到彼岸)으로 번역한다.

금강이 반야의 특성을 나타낸다면,
반야는 수단이고,
도피안은 그 반야를 써서 성취해야 할 目標에 해당한다.
도피안,
민통선 근처에 이 이름을 단 절간이 있다고 들었다.

“피안, 저 언덕으로 가 닿았다”는 뜻인데,
그런데, 거기가 어딘지 아는 사람이 있는가.
저 언덕은 그만 두고,
대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언덕’은 어디인지,
그것부터 분명히 해야 대책이 설 것이다.

어찌 보면 개인이나 사회, 역사와 문명이 어느 것 하나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가고 있는 활동이 아니겠는가.
배가 고프면 밥을 찾고, 피곤하면 퍼질르며,
나이가 들면 짝을 생각하고,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하는 것 등등이 그렇다.

세속이 추구하는 도피안은 외향적이다.
그것은 늘 밖의 대상을 포섭하고 동화하는 활동인데,
불교는 이와는 달리
내부의 피안에 도달하고자 하는 총체적 노력이다.

마음의 안쪽에 무엇이 있느냐고 묻는가.
거기, 불건전한 상념과 정념, 충동들이 있다.

이 무지,
무명(無明)이 있는 곳이 이 언덕이고,
이것을 불식시키고 마음이 밝아진 것이 저 언덕이다.
여기에 얼마나한 시간이 걸릴까.

전광석화(電光石火),
발뒤꿈치 한번 돌리면 열리는 세상이기에,
불교는 하나도 어렵지 않다.
어려운 것은 다만
이 밝은 지식의 불꽃을 유지하기가 어렵다는데 있다.

다시 말하면,
돈오(頓悟)는 쉬운데, 점수(漸修)는 어렵다.
요컨대 불교는 이렇다 할 물건을 안겨주지 않는다.

그래서 <반야심경>은 무득(無得)이라고 했다.
불도를 통해 우리는 얻기보다 차라리 잃은 셈인데,
그동안 나를 지배하던 불건전한 상념과 정념,
충동들을 태워버렸기 때문이다.

그때 질식하고 있던 불성이 기지개를 켠다.
그게 해야 할 전부이다.

하나 덧붙여야 할 것은,
이게 ‘몰록 깨달음’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닷가에서 자란 나는,
그것을 흡사 기름때
가득한 바다에서 헤엄치는 것에 비유하곤 한다.

양손으로 한번 밀치면,
바다는 깨끗한 속살을 드러냈다가,
곧 다시 밀려오는 기름에 덮여버린다.

그 전에 다시 양손을 노처럼 저어 길을 열어야 한다.
한참을 헤치고 용을 써서 나가야 비로소 깨끗한 바다를 지나
부드러운 모래사장에 닿을 수 있으니,
거기 시원한 콜라 한잔과 싫지 않은 태양이 기다리며 빛나고 있다.

그래서 점수(漸修)가 필요하다.
불건전한 상념과 정념, 충동들은
한번 태운다고 고이 물러가는 것이 아니니...

여러 생을 거쳐 묵은 업장(業障)과,
어난 이후 한 번도 닦아본 적이 없는 습기(習氣)로 하여
처음에는 뻑뻑하기 이를데 없다.

그러다가 숙련과 더불어 운신이 점점 임의로와지고 안정된다.
그것은 자동차 운전을 익히는 것과 닮았다.

처음에는 클러치, 액셀 브레이크 헷갈리고
운전대가 겉돌지만,
점차 익숙해져서 나중에는 음악을 흥얼거리거나,
지나가는 아가씨의 선글라스가 눈에 들어올 정도가 된다.

깨달음으로 일대사인연이 끝난 것은 아니다.
조주가 빗자루를 들자, 객이 핀잔을 주었다.
“먼지 하나 없고 깨끗한데, 뭘 더 쓸려고 그러시오.”

조주가 허공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런, 여기 또 하나 날라 오네.”
도피안은 내 마음 안에서 일어난 사태이다.
피안은 시공을 점하고 있는 어떤 다른 세계에 있지 않다.

극락은 없다.
젖과 꿀이 흐르는, 환상의 나라. 서방 정토도 없다.

혜능은 <육조단경>에서
“그런 곳은 없다”고 분명히 말했다.

그러면서
“내가 지금 여기서 서방 정토를 보여주랴”라고
슬쩍 청중들을 떠보았다.
이곳을 떠나가서 이르러야 할 저 곳은 없다.
지금 여기 서 있는 내 마음 밖에는 어떤 나라도 없다.

혜능이 다시 말한다.
"마음이 헤매면 차안(此岸)이고, 마음이 깨달으면 피안(彼岸)이다.”

*경(經)
이것이 여덟자 <금강반야바라밀경>에 담긴 뜻이다.
위의 근본 취지를 '미리, 벌써' 이해하고 있다면,

<금강경>의 본문은 읽을 필요가 없겠다.
그때는 수많은 주석도 돌아볼 필요 없으니,
더구나, 내 군소리 사설은 불쏘시개 감도 못되는 것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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